ㅡ‘진중권의 트루스 오디세이’는 이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탈진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 해설이다.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포스트 트루스’ 시대//.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가짜 뉴스가 판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시대다.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정보가 더 그럴싸해 보이고, 목소리 큰 쪽이 여론을 쥐고 흔드는 이 혼돈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진중권 교수는 “과거의 지식과 패러다임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현상들이 한국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나고, 확산되는지 미디어 이론과 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내려 한다”고 말했다. 진 교수는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이란 주제로 포문을 연다. 예전에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걸 바꿀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사실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을 두 동강 냈던 조국 사태는 사실과 대안적 사실의 충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허구를 사실로 가공한다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진영 이익과 내 편 선동에 눈이 먼 정치 세력, 불편한 진실보다 보고 싶은 환상만 좇는 대중이 문제다.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이자 독설가로, 늘 논쟁의 중심에 섰던 진 전 교수는 “이번 연재를 통해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대한 다양한 공론의 장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https://s3-us-west-2.amazonaws.com/secure.notion-static.com/ef334c36-6c65-4a2e-ae59-2eddb714a164/yyy0.jpg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왼쪽)과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 현장을 찍은 항공 사진. 앞쪽에만 사람이 몰려 있는 트럼프 때와 달리 오바마 취임식장은 인파로 가득 차 있다. 미국 언론 역시 트럼프 때는 90만명, 오바마 때는 그 2배인 180만명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참모들은 ‘대안적 사실’을 운운하며 오바마 취임식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고 우겨 빈축을 샀다. 워싱턴=AP 연합뉴스

https://s3-us-west-2.amazonaws.com/secure.notion-static.com/a8765c52-3baa-4e1b-97d2-02042cf7faf6/yyy1.jpg

2017년 1월 미국 백악관의 션 스파이서 대변인이 언론 브리핑에서 ‘매체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인원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행사 당일 근처 지하철역의 승하차 인원은 42만 명으로, 오바마 취임식 때의 32만 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인용한 수치는 아무 근거 없이 멋대로 꾸며낸 것이었다. 현장을 찍은 항공사진도 트럼프 취임식의 참석자가 오바마의 것보다 훨씬 적었음을 보여준다.

그 유명한 사건은 다음날 열린 ‘기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났다. ‘대변인이 왜 거짓말을 하냐’는 저널리스트의 추궁에 캘리언 콘웨이 백악관 고문은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대변인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말한 것뿐입니다’ 저널리스트가 곧바로 반박을 했다. “이 보세요, 대안적 사실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냥 거짓일 뿐이지요.”

‘대안적 사실’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그 말을 그저 변명의 수사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표현은 동시에 디지털시대에 등장한 어떤 중요한 경향을 가리키고 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거짓도 ‘대안적’ 의미에서 사실이 된다. 가령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체험을 할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나마) 허구를 대안적 사실로,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인다.

닌텐도 Wii로 테니스를 치려면 가짜를 진짜로 대해줘야 한다. 플레이어는 진짜 테니스 코트에 있는 양(as if) 온 몸으로 라켓을 휘둘러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가짜가 진짜가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게임에 몰입해도 플레이어는 그것이 현실이 아닌 대안적 현실임을 의식한다. 그런데 만약 그 대안이 너무 강렬해 플레이어가 현실로 착각할 정도라면 어떻게 될까.

증강현실(AR) 기술 발달은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게 만든다. 인천 SK행복드림야구장에 증강현실(AR)로 구현한 비룡이 등장하자 관중들이 열광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https://s3-us-west-2.amazonaws.com/secure.notion-static.com/9031b07f-32b2-46cc-b477-15e7e53a040c/yyy2.jpg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서 교수가 자기 딸의 대학 입시를 위해 총장의 표창장을 위조했다. 그녀가 위조한 것은 표창장만이 아니었다. 딸과 아들의 상장과 수료증 일체를 위조하거나, 혹은 허위로 발급했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 이미 학교에는 그에 관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것이 동양대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즉 사실(fact)이다.

하지만 학교 바깥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표창장은 진짜이고, 총장이 거짓말을 했으며, 그 배후에는 자유한국당과 검찰권력이 있다. 이들 적폐세력이 개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법무장관을 공격했으며, 정경심 교수는 그 더러운 음모의 순결한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학교 ‘밖’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사실, 즉 ‘대안적 사실’이다.

문제는, 존재하는 ‘사실’보다 허구에 불과한 ‘대안적 사실’의 효과가 더 강렬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것이 허구임을 밖으로 알리기 위해 내가 학교를 그만둬야 할 정도였다. MBC의 ‘피디수첩’, TBS ‘뉴스공장’, ‘유시민의 알릴레오’, ‘오마이뉴스’ 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친여 매체들이 이 ‘대안적 사실’의 제작과 유포에 가담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알리레오 캡처

https://s3-us-west-2.amazonaws.com/secure.notion-static.com/b476593f-759a-4b1b-b6a7-d84f5a121654/yyy3.jpg

왜 그랬을까. 그들 모두 정경심 교수의 거짓말에 속은 것일까. 아니다. 그들도 표창장이 위조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보도에서 뭘 드러내고, 뭘 감추려 했는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김경록씨 녹취록을 공개할 때 유시민씨는 그가 “내가 봐도 증거인멸이 맞죠”라고 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뺐다. 감추어야 할 사실의 존재를 알았다는 얘기다.

유시민씨는 이미 동양대 표창장이 위조임을 알았다. 내가 알렸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그가 취한 태도였다. 표창장이 실제로 가짜라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안적 사실’을 제작하여 현실에 등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아무 걱정 말라’고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사실을 뜻하는 팩트(fact)의 어원은 라틴어 팍툼(factum)이라고 한다. 팍툼은 ‘제작된’이라는 뜻. 결국 사실은 ‘제작되는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유시민씨가 가진 ‘사실’의 개념은 여기에 가깝다. 다시 말해 내게 사실이란 ‘이미 일어난 일로서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유시민씨에게 사실이란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고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는 것’인 셈이다.

조국수호 검찰개혁을 위한 서초달빛집회 참가자들이 지난 4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검경수사권 조정, 표적 수사 중단 등을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https://s3-us-west-2.amazonaws.com/secure.notion-static.com/a8c42be2-e097-4a95-a41e-dc93eaa457f4/yyy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