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대안적 사실’이란 낱말이 어쩌면 내년쯤 대기업 시사상식 시험문제로 출제될지 모를 일이다. 잽싸게 시사상식사전에 오른 이 낱말은, 트럼프 대통령 이후의 세계에 대한 풍자화처럼 보인다. 사실을 둘러싼 증언이 경합을 벌일 때 달리 증언된 사실을 가리키고자 만들어졌다는 전문 법률용어라는 ‘대안적 사실’은 졸지에 흔치 않게 듣는 시대의 말이 되었다. 대안적 사실이란 뭘까 궁금해할 이들을 위해 사정을 밝혀볼까 한다.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보도한 <로이터> 통신의 항공사진은 듬성듬성 자리가 빈 초라한 장면을 중계하였다. 사진 속 모습은 전임 대통령이었던 오바마의 취임식과는 완연히 달랐다. 당장 대중매체는 트럼프가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고 빈정댔다. 물론 잠자코 있을 백악관이 아니었다. 백악관 대변인이 곧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파가 운집했다고 브리핑을 했고, 이러한 뻔뻔한 허세는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백악관은 이에 대해 다시 한번 해명을 했다. 말인즉슨 그것은 대안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대안적 사실? 무슨 말일까. 풀이해보면 대충 이런 것이지 싶다. 먼저 그것은 객관적 사실을 눙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싶어하는 그릇된 자세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자신의 소망을 투영하여 멋대로 재단한다. 그런 점에서 이는 아주 질 나쁜 이데올로기다. 그렇지만 이를 달리 곱씹어볼 수도 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의 눈에만 보이는 진실을 우리는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믿지 않는 자의 눈에는 아무리 많은 것이 보여도 적게 보이지만, 믿음을 가진 자라면 아무리 수가 적어도 그것은 무한히 많은 수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세상에 단 한명뿐인 외로운 독생자, 예수가 보편적인 진실의 화신이라고 믿는 기독교도에게 그렇듯이 사실이 곧 진실인 것은 아니다. 나는 대안적 진실을 해석하는 관점 가운데 차라리 후자를 편드는 몽니를 무릅쓰고 싶다는 생각이다. 대안적 진실을 들먹이는 이들을 비웃으며 포퓰리즘 정권을 조롱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속기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닐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실을 좋아한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사실 확인을 위한 뉴스까지 등장할 정도다. 그러나 사실이야말로 일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노조가 파업을 하면 투자자가 떠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파업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준칙에 따라 판별된 사실이라면, 이야말로 이데올로기다. 노조가 부당한 고용조건에 맞서 파업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외려 사실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사실에 관한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져야 한다. 프랑스혁명은 흔히 천부인권이라는 약속을 세상에 가져온 사건으로 취급된다. 그것은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유토피아적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실로 자리잡았다.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사실로 통한다. 세상은 불평등한 것이 사실적이므로 그러한 사실에 거스르는 것은 이데올로기라 깔보는 자들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이다. 사실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줄 것을 찾지 못하기에 못된 인간들을 혼내주는 귀신이 있을 거라고 믿는 이들이야말로 더 사실적일지 모른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며 깔깔대는 이보다 차라리 귀신이 있어 저 인간들을 혼내줬으면 좋겠다는 이들의 믿음 속에 고통스러운 삶의 사실은 더 크게 또 많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